차이나(맛) 트레일 (2) 큰 구렁이와 벌레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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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맛) 트레일 (2) 큰 구렁이와 벌레의 나라

지금의 四川省을 옛날에는 巴蜀으로 불렀다. 사실은 巴(Ba)와 蜀(Shu)의 두 나라 였다. 당시 중국의 중심(中原)이었던 關中지역을 진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사람들은 쉽게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前인 춘추전국시대에 각 제후국들은 부국강병책으로 나라가 통합되고 개간지가 확대되었지만 巴와 蜀은 지리적 이유로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왔다. 지금의 重慶부근의 소수민족은 巴國을 세워 살았고 지금의 成都지방은 蜀국을 세워 스스로 지배하고 있었다. 巴는 강이 많으나 지형이 거칠었고 비가 많이 와 습도가 높다. 그렇지만 蜀은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였다. 어쨌든 당시도 지금처럼 무덥고 습도가 높아 뱀이 우글거리고 벌레가 많았던 것 같다. 巴라는 글자가 큰 구렁이라는 뜻이 있고 蜀도 벌레나 작은 동물과 관계가 있다. 전국시대 말기 제후국의 하나인 秦이 天下를 統一한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평정하고 인도 원정을 하면서 그리스 문화(헬레니즘)를 소개하였는데 秦이 그 길목에 있어 그리스 문화를 빨리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 서역의 빠른 말(신병기)을 전쟁에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이 그 요인 중 일부가 되지만 秦의 惠文王이 용맹한 司馬장군을 시켜 진령산맥을 넘어 蜀을 점령, 그 넓은 평야를 군량미 보급창으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만큼 成都盆地는 풍부한 곡창지대임이 분명하다. 漢으로 내려오면서 인구도 늘어나고 성도평야에 뽕나무를 심어 중국실크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成都의 古地名이 錦官城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실크(錦)의 집산지에 실크 전매관청이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서역지방을 실크로드로 부르는 것도 주로 사천성의 실크가 서역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을 말한다. 지금은 杭州의 실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중국이(南宋) 북방의 소수민족에게 밀려 양쯔강 남쪽(지금의 江蘇省)으로 쫓겨가 북방이 막히게 되자 부득이 아랍상인들을 통해 해상으로 서방세계에 보급되었다. 지금은 成都盆地쪽으로 가보면 뽕나무가 많이 보이지 않고 야산을 개간한 곳에 콩밭이 많다. 그래서인지 성도의 두부요리가 유명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麻婆두부의 본고장도 成都이다. 매운 맛의 본고장 사천성의 실크가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건너가듯이 유럽의 산물도 사천성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당시 서역과 사천성과는 무역이 활발하였는데 唐나라의 유명한 詩人 李白도 이러한 무역상인의 아들이었다. 지금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중국사람의 군것질 중 하나가 해바라기 씨다. 볶아낸 해바라기 씨를 먹고 새까맣게 그 껍질을 뱉어내고 있다. 열차 속, 극장 속,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가도 예외가 없다. 해바라기는 본래 아메리카대륙의 중서부가 원산지이다. 컬럼버스에 의해 미 대륙의 해바라기는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다시 유럽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사천성으로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사천성 사람들은 유독 해바라기 씨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사람도 즐겨먹는 매운 고추를 사천성 사람들도 좋아한다. 우리가 고춧가루를 넣은 음식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중국 사람들은 사천성 고추가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서 서해를 건너 한국으로 갔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것은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왜군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고추 역시 중남미가 원산지로 컬럼버스에 의해 스페인으로 건너갔다가 스페인의 식민지 필리핀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추를 전해준 일본사람은 고추를 먹지 않는다. 김치를 보더라도 일본김치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 다꾸앙 등 야채를 그냥 소금에 절여 먹는다. 우리 김치는 고추가루가 없이는 김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춧가루로 붉게 물든 김치이다. 우리나라에 4∼5세기 米作이 들어와 쌀이 주식이 된 이후로 야채를 곁들이기 위한 김치(pickle)가 있었겠지만 천 수 백년간 우리 김치는 지금의 일본 김치처럼 야채 소금절임이었다. 지금은 고추와 젓갈 등을 골고루 넣어 다양화된 우리 김치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일본은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고추를 역수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자료를 보면 일본에서는 고추를 먹는데 쓴 것이 아니고 보온에 사용했다고 한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말려서 몇 등분으로 하여 일본 사람들은 양말(다비)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고추의 매운 것이 발을 따뜻하게 하여 추운 겨울날을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왜군들의 양말 속에 고추가 나왔다. 그것을 우리는 가루로 빻아서 음식에 넣어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측 자료를 보면 사천성에 고추가 유행한 것은 더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 당시이지만 왜군으로부터가 아니고 明나라 군대로부터라고 한다. 李如松의 明軍은 왜군의 침입을 받은 朝鮮을 구하러 왔다. 그 明軍 중에는 四川省 출신도 있었다고 한다. 明軍은 이 사천성 출신들의 군인을 위해 요리사를 대동하여 왔는데 그 사천성 요리사가 주둔지 근처의 조선사람들에게 그 매운 고추요리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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