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의 이야기
일본에 홍콩과 비슷한 입지를 갖고 있는 도시가 있다면 나가사키市라고 생각한다. 더 엄격히 이야기하면 홍콩과 비슷한 곳이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이다. 데지마는 나가사키항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쇄국정책을 편 江戶막부(1602-1868)의 유일한 대외창구였다. 홍콩이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면 데지마는 에도막부에 네덜란드(화란) 상인에게 내주고 商館을 갖도록 했다. 물론, 규모는 홍콩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기능면은 유사했다. 나가사키에 가보면 데지마는 이름만 남아있고 매립으로 육지에 편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데지마를 통해 나가사키에 많은 외국인이 드나들었고 그로 인해 나가사키 주변의 일본인들은 다른 지역보다 서양의 문물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시 주변 나가사키현 및 야마구치(山口)현 등은 홍콩인근의 중국 광동성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도 초기에는 마카오 후에는 홍콩을 통해 서양의 문물이 흡수되어 인근의 광동성이 빨리 개화되고 중국 근대사의 인물 중에 광동성 출신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太平天國을 일으킨 洪秀全이 광동성 사람이고 그가 죽고 난 뒤, 2년후 태어난 孫文도 광동성 출신이다. 비슷한 것은 청말기 太平天國의 亂이 광동성에서 시작하듯이 에도막부 말기 막부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곳이 나가사키 주변의 山口현의 長州潘이었다. 太平天國은 그 理想에도 불구하고 內部 모순과 여타 실력있는 漢族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長州潘(지금의 야마구치현)의 반란은 사츠마潘(지금의 가고시마현)이라는 에도막부에 불만을 가진 또 다른 지역과 연합, 반란을 승리로 이끈다.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를 통해 들여온 신무기(연발총)로 무장하고, 천황을 끌어들여 京都 후시미城 전투에서 勝機를 잡고 결국 에도막부의 심장부인 에도를 함락, 明治유신을 시작한다. 홍수전의 太平天國의 군대가 증국번, 이홍장의 淸軍을 무찌르고 北京을 점령한 꼴이 된다. 만일 그렇게 太平天國의 亂이 성공한 혁명이었다면, 후에 신해혁명보다 50년 앞서 漢族의 정부가 들어섰는지 모른다. 중국은 太平天國의 실패로 50년후 孫文을 기다려야 했고, 일본은 長州의 반란이 성공하여 明治혁명을 통한 착실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출세한 막둥이
아시아의 근대화 우등생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인근국의 모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인근국을 강제합병 또는 침략으로 원성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동업자중에 가장 먼저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켜 급성장을 이루어 부러움을 사긴 하였는데 나중에 오랜 이웃 동업자마저 강제합병 및 매수(M&A)해버려 원성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예로부터 중국文化를 부모로 생각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한국의 문화를 큰 형님으로 생각해 왔다. 文化면에서 가장 막둥이였다. 그래서 한때는 이것저것 구박도 많이 받았던 일본이 갑자기 성공한 셈이다. 지금까지 文明 또는 文化의 길에서 가장 떨어진 종점같은 일본이 갑자기 文明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되어버렸다. 동서문명의 교류의 통로 silk road가 사라센의 흥성으로 육로가 막히자 대항해를 통한 지리상 발견으로 섬나라 일본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요충지에 놓이게 되자, 1853년 미국 흑선의 방문을 받게 된다. 흑선의 대포소리에 혼비백산한 일본은 그 충격을 재빨리 흡수, 明治혁명을 성공시키고 새로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아시아의 대표주자 국가였던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패배하자 설상가상으로 태평천국의 난 등 국내정치가 불안해지고 손문 등 혁명세력이 대두하게 된 것과 비교된다. 결국, 손문에 의한 신해혁명의 성공은 일본 明治지식인의 도움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손문은 일찍 일본에 망명지를 두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광동성의 손문과 나가사키의 우메야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사람도 있다.
손문과 우메야
일본에서는 손문의 신해혁명 성공과 관련, 나가사키의 우메야(梅屋)라는 일본인에 대한 자료가 많다. 최근 일본의 한 TV에서 우메야가 손문을 도왔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손문의 큰 형(손미)은 미국 하와이로 이민, 사업에 성공한다. 손문은 형을 찾아 미국에 간다. 그때가 그의 나이 12세경이다. 그의 生家(지금 광동성 中山市) 근처에 흐르는 珠江을 따라 나오면 하와이로 연결되는 태평양이 된다. 하와이에 도착한 손문은 큰형의 권고로 하와이 이오라시학교(Iolasi School)와 오아후 칼레지(Oahu College)에서 공부한다. 손문은 영어도 배우고 민주주의의 미국문화에 빠져들면서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다. 이것을 크게 우려한 손미는 손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5년간의 하와이 생활을 통한 훌륭한 영어실력과 근대학문의 배경으로 홍콩대학의 의학부에 진학, 의사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개업한 곳이 마카오였고 “鏡潮의원”의 간판은 지금도 마카오에 있다. 그러던 그가 홍콩에서 한 일본인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손문이 만난 일본인이 바로 우메야(梅屋庄吉)였다. 그는 홍콩 센추럴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는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이었다. 센추럴의 우메야가 경영하는 사진관에서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의기투합한다. 손문의 동양의 해방론과 중국의 혁명에 대해 우메야도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손문은 이론뿐이지 거사자금이 없었다. 우메야는 돈을 대겠다고 하면서 손문으로 하여금 혁명을 일으키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문이 우메야의 사진관을 가게된 것은 홍콩의과대학의 손문의 은사인 제임스 칸트리 박사인데 그는 사진기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우메야의 단골손님이었고, 우연한 기회에 손문을 그 사진관에 데리고 가서 소개를 시키는 바람에 손문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한다.
유주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