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120년전 홍콩을 공포로 몰아넣은 전염병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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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120년전 홍콩을 공포로 몰아넣은 전염병의 정체는?


홍콩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1894년으로 거슬러 가서 주위를 둘러본다면 도시는 어둡고 암울하며 겁에 질린 모습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사망율 93%라는 치명적 전염병이 홍콩 땅을 휩슬던 시기였다. 마스크도 없던 그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치사율 93%의 치명적 전염병


우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1874년부터 1894년까지 20년 동안 홍콩 인구는 3배로 팽창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인구밀도가 급증하고 외부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인구의 유입도 크게 이루어지다 보니 홍콩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선1855년, 중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운남성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한다. 이것은 중국의 동부 지역, 즉 광서성과 광동성으로 퍼진 후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광동성 광저우에서 이 전염병이 처음 발견된 것은 1894년 2월이다. 질병은 확산되어 같은 해 4월에는 광저우에서 전염병을 피해 홍콩으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5월이 되자 광저우에는 이 전염병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구가 만 명에 달한다.


당시 광저우와 홍콩간에 해상 교류가 활발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의 설날인 춘절을 맞아 그해 2월 한 달간 약 4만명이 홍콩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결국 홍콩 역시 5월 8일 첫 확진자가 나오면서 막대한 피해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홍콩의 정부 기관 중 보건위생부에 해당하는 결정국(潔淨局)은 전염병 발생에 대한 방역 조치를 실시한다. 오염 지역을 소독하고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 치료를 진행하였다. 또한 이 질병으로 죽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등도 병행하었다.



홍콩 정부와 동화 병원의 대립



여기서 정부와 민간인들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당시는 영국이 식민지 정부를 구성하여 홍콩을 통치하던 시기였다. 정부가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산화칼슘을 뿌리고 풀더미위에서 태워버리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거부감이 일어났다.


중국의 전통 장례에 익숙한 현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염자는 서양식 의료 기관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는데 중의학만 접해 온 민중들은 생소하고 믿기 힘든 서양 의술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냈다.


결국 민간인들의 거부가 행동으로 나타났다. 전염병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홍콩 정부의 방역 조치를 피하기 위해 같은 해 5월 20일부터 매일 천여 명이 광저우로 돌아갔다. 사실 이들중 상당수는 가는 도중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이들은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중국식 전통 장례를 치르며 죽는 선택을 취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시체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파업을 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정부는 이 모든 것의 배후 조종자로 동화 병원과 사회 기관인 보량국(保良局)을 지목한다.


셩완에 위치한 동화(東華) 병원은 1870년에 세워진 홍콩 최초의 한의학 종합 병원이다. 동화병원은 민중들로부터 두터운 믿음과 지지를 받고 있었고 종종 현지 중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염병 발생 후 정부의 서양식 공공 의료 정책과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하게 된다. 1896년 정부에서 동화병원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시찰케 했는데 위생 상태가 열악하고 병상은 밀집되어 있었으며 통풍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전염병에 취약함을 드러내었다.


홍콩 정부는 이 병원내의 의심 환자들을 서양식 병원에 이송하려 했으나 환자가 반대하면 동화측은 이송을 거부하였다. 결국 정부는 동화병원의 개혁에 손을 대면서 한의학 종합병원에 서구식 의료 체계를 주입하게 된다.



255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전염병이 가져 온 변화


홍콩에서 전염병이 처음 발생한 1894년, 세균학자들은 이 원흉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이들이 밝혀낸 몹쓸 질병의 정체는 페스트였다.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전염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페스트는 오늘날 흑사병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유행병은14세기 유럽을 강타하여 현지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간 바 있다. 지금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풍토병으로 남아 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페스트는 홍콩에서 기세를 떨쳤고 무려 2550명이 목숨을 잃었다. 홍콩 정부의 여러 방역 조치들에도 불구, 페스트는 풍토병이 되어 1923년까지 매년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홍콩에서 페스트 창궐 이후 정부는 정기적으로 소독을 실시하였고 오염 배수 처리등의 시설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전염병의 온상이었던 곳에 대대적인 재건 계획을 시행한다. 1911년에는 구룡 야마테이에 또 하나의 종합병원인 광화(廣華) 병원이 문을 연다. 외관은 동화병원과 비슷한 중국식 구조로 세워졌으나 의료 설비는 비교적 서양식이었다.



위생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게 된다. 공중 위생 관념이 희박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전염병 사태는 교훈을 주었고 중의학을 맹신했던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서양 의학으로 옮겨지게 된다.


120년전의 페스트, 2003년의 사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전염병은 반갑지 않은 유행을 일으키며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이런 질병들은 결국 철저한 개인 및 공중 위생 이행, 정부의 적절한 방역 정책과 조속한 백신 개발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빠른 시일내에 극복이 가능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돌아오니 이곳 사람들은 또다른 전염병과 싸우는 중이다. 이번 유행의 끝을 기약해 본다.

 


참고 문헌: 《香港的100件大事 (上)》 中華書局(香港)有限公司, 2014 《香港文化導論》中華書局(香港)有限公司,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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