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하우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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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살다간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 둘 홍콩회사가 있다면 怡和洋行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지사람들도 Ewo라고 발음하는 Jardine , Matheson & Co., Ltd가 바로 그것이다. 홍콩의 역사는 아편무역과 관련되고 怡和洋行은 아편무역으로 起家하였으므로 홍콩은 자딘 즉 怡和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인다. 지금의 코즈웨이 베이 부근인 홍콩의 東角(East Point)은 19세기에는 사실상 자딘 왕국이기도 했다. 다소 과장이 있지만 지금도 센트럴에 가면 怡和의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라고 하고 홍콩 사람의 의식주에 怡和를 떼 놓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할 정도이다. 언젠가 Fortune 잡지의 홍콩특집에서 홍콩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의 순서를 매긴 적이 있다. 홍콩에 대하여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이 쟈키 클럽, 두 번째가 怡和, 세 번째가 홍콩상하이 은행(HSBC), 마지막이 홍콩 총독으로 보도되었었다. 怡和가 홍콩에서는 총독보다 더 영향력이 크고 홍콩의 수많은 洋行중의 단연 최고(洋行之王)였다는 얘기가 된다. 스타훼리 선착장과 익스체인지 스퀘어 건물 사이에 50층 흰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건물의 특색은 별 것 아닌데 창문이 모두 둥글둥글하다. 배의 창문(船窓)을 본떴다고 한다. 이 건물이 1970년대 怡和洋行의 본사로 지은 건물이다. 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서인지 본사를 지으면서 건물의 창을 모두 무역선의 船窓으로 꾸몄다. 18세기 해양시절의 향수가 진하게 깔려있다. 康樂大厦라고 부르는 이 건물의 둥근 선창은 인체의 썩 아름답지 않은 다른 둥근 것과 연상시켜 죠크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더 높은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많아 홍콩의 적은 사이즈 건물로 다운 그레이드 되었지만 1973년 동건물이 완공될 당시에는 아시아 최고기업 怡和에 걸맞는 건물로 아시아 최고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대 중국무역은 주로 인도 캘커타 중심의 영국 동인도회사가 전매 독점하고 있었다. 독점에 의한 폐해가 싹트기 시작하자 영국정부는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자유 상인들 (free merchants)에게 부여하였다. 아편무역만 하더라도 당초 동인도회사가 독점하고 있어 자유상인들이 끼어 들 자리가 없었는데 1830년대에 와서 중국(청)이 아편금수를 강화하자 점차 자유상인들에게 아편거래를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상인들이 아편거래에 뛰어들기 앞서 1810∼20년대에는 동인도회사의 중역 또는 사원을 중심으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아편은 중국정부가 수입을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어 밀무역에 의한 몰수 등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한 번 거래에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인기있는 품목이기도 하였다. 船 에서 鴉片起家 怡和를 창업한 윌리암 자딘(William Jardine)은 동인도 회사소속 무역선의 船 였다. 1784년 생인 그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의사로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보다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동인도 회사 무역선의 船 로 취직한 것이다. 船 로서 그는 아편 2상자까지 사고 팔 수 있는 권한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닥터 자딘은 차츰 선의로서 받는 월급보다 자기 몫의 아편 판매에 의한 수익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1817년 닥터 자딘은 과감하게 선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회사를 만든다. 그는 대중국 아편무역에 직접 뛰어든 것이다. 그는 당시 동인도회사 중국본부가 있던 Canton(지금의 廣州)에 자신의 회사를 차린다. 이름도 즐겁고 화목하게 번성하길 기원하는 의미의 怡和라고 짓는다. 나는 언젠가 康樂빌딩에서 W. Jardine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죠지 친너리(G. Chinnery)라는 19세기초 마카오에서 활동하던 화가가 그린 것이다. 눈이 둥글고 입술이 두툼한 약간 미소를 띄고 있는 자딘의 모습은 황금을 추구하는 아편무역상인이라기보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유쾌한 외교관 스타일이다. 금방 뭔가 쓰다가 돌아앉은 모습으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가볍게 주먹진 왼손을 데스크에 걸치고 오른손으로 깃털 달린 펜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흰 셔츠에 흰 넥타이, 흰 바지까지 온통 흰 색깔로 멋을 부리고 검은색의 쟈켓과 검은 신발로 흑백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국(청)의 道光황제가 아편의 피해를 우려하고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광주에 내려보낼 때 닥터 자딘은 이미 아편大商이 되어 회사를 동업자 Matheson에게 물려주고 런던으로 돌아가 의회에 진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임칙서에 의해 자딘의 회사 창고가 기습되고 황금보다 귀한 아편이 몰수당하자 자딘회장은 의회의원들을 동원하고 파머스톤 당시 수상을 설득 영국정부로 하여금 무력개입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자기들의 재산(아편)을 되찾고 차제에 밀수로 취급된 아편무역을 합법화 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이어짐]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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