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 12월의 집단 복수극 : 추신쿠라(忠臣藏)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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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전 12월의 집단 복수극 : 추신쿠라(忠臣藏) 下

忠臣들의 최후 문제는 아코오城을 지키던 家臣들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主君과 城을 잃은 浪人이 되어 버렸다. 家臣의 우두머리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內藏助)는 다른 家臣과 비밀 접촉, 1년후 主君을 죽게 만든 吉良가 살고 있는 에도의 吉良자택을 습격할 것을 계획한다. 당시 사무라이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경우 양쪽 모두에게 벌을 주는 전통을 깨고 아사노에게는 즉일 切腹케 하고, 吉良는 무사히 넘어가게 한 幕府의 처사에 아사노家의 家臣들은 불만이었다. 결국 그들은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1년 9개월만에 吉良저택을 습격, 吉良의 가신을 죽이고 숯창고에 숨어버린 吉良를 찾아내어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主君 아사노의 무덤이 있는 에도의 泉岳寺로 몰려가서 그 무덤앞에 吉良의 목을 바치고 원수를 갚았다고 告한다. 그리고, 幕府에 통보, 자신들은 義를 위한 행동으로 1년전 “忍傷 사건”을 재심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幕府에서는 “忍傷 사건”의 처리가 정당하였다고 하며, 47명을 체포, 여러지역에 나누어 구금하였다가 이듬해 2월 모두 切腹케 한다. 47명은 결국 主君 아사노의 원수를 갚고 장렬하게 生을 마감한 셈이다. 47명의 忠臣중에는 부자간도 있고, 숙질간도 있었다. 최고령 62세, 최연소 15세까지 다양하였다. 이들은 모두 아사노家의 집안 사찰 泉岳寺에 장사를 치루었다. 이것이 대략적인 사건의 전말이다. 당시 에도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아코오의 가신 47명의 忠臣들이 일년간 계획을 세워 기어이 복수를 완성하고 그후 장렬하게 切腹으로 죽음을 맞이한 멋진 하나의 드라마였다. 또한, 유교의 이념을 높이 산 에도막부로서도 主君을 위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47名의 사무라이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후 忠臣藏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보급되어 일본사람으로 忠臣藏을 모르는 것은 한국사람이 春香傳을 모르는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따라서, 47명 家臣의 우두머리 大石가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다. 大石가 忠臣을 이끌고 끝내 복수를 성공한 것에 모두 박수를 보낸 것이다. 더구나, 大石은 15세인 자신의 아들 치카라(主稅)도 참가케 하여 吉良 저택 습격시 자신은 정문을, 아들은 뒷문을 통해 침입토록하여 거사를 성공한 후, 부자 모두 동시에 切腹한 것이다. 15세의 소년 오오이시 치카라(大石主稅)가 切腹한 곳은 지금은 東京의 이태리대사관이 되어 12월이 되면 주일본 이태리대사가 그를 위해 供養을 한다고 한다. 名君 吉良 그러면, 吉良는 복수를 당하고 역사에서 악인으로 취급되어도 좋을 정도의 인물인가. 나고야에서 멀지 않은 吉良町(읍)가 있다. 그곳에 게죠지(華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다. 이 절은 수백년간 吉良家의 집안 사찰(菩提寺)로서 吉良家의 역대 인물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에도에서 살해된 吉良도 이곳으로 옮겨와 조용히 잠들어 있다. 그런데 吉良町에 가보면 그의 치적이 여기저기 많다. 지금도 吉良町의 주민들은 忠臣藏으로 통해 吉良가 잘못 알려진데 대해 분개해 하고 있다. 그는 名君으로 토목사업 등을 통해 주민들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당시 주민들도 吉良를 칭송하는 비석을 여기저기 세우기도 하였다. 동일한 역사를 두고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틀리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말을 탄 吉良의 동상이 눈에 띈다. 유명한 “赤馬의 吉良殿”이다. 吉良는 에도의 업무를 떠나 자신의 領地 吉良町에 돌아오면 자신의 말(馬)을 따로 갖지 않고 있었다. 농사에 쓰이는 말(赤馬)을 그냥 끌어다 領內를 돌면서 領地의 백성들의 어려운 점을 살피고 해결해 줄 정도로 성격이 소박하였다고 한다. 吉良町에서는 벚꽃의 명소이기도 한 黃金堤가 있다. 이것도 吉良가 주민을 위해 제방을 쌓아 홍수의 피해로부터 전답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또한, 吉良町는 三河灣에 인접하여 염전을 통해 주민의 소득을 올리기 위한 사업도 하였다. 지금은 吉良町의 鹽田이 유명하다. 역사인식의 차이 12월이 되면 T.V 등에서 누구나 보게되는 忠臣藏에서 47인의 아코오(赤穗) 浪士만이 의리의 사나이들로 이해되고 吉良는 惡人으로 취급받는데 대해 吉良町 주민들은 불만이다. 당시 에도城의 “松의 廊下”라 하여 미다지문(후시마)에 거대한 소나무가 그려졌다고 부쳐진 이름의 복도에서 일어난 “칼부림 상처”의 사건은 전적으로 아코오 “도노사마”(領主) 아사노(淺野)의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서로 다툴수도 있다. 더구나 京都로부터 온 천황의 칙사를 접대하는 일임에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의전 전문가인 吉良의 행동을 두고 의전을 잘 모르는 아사노는 핀잔을 주는 吉良를 딴 뜻이 있는 것으로 판단까지 한다. 더구나, 그는 吉良보다 신분이 높은데도 지시를 받는 입장이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는 결국 에도성내에서 빼어서는 안되는 칼을 뽑았고, 그것이 큰 죄에 해당되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切腹 명령을 받은 반면, 吉良는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淺野의 領地, 아코오까지 빼앗기고 아사노家의 再興도 거부되자 이것을 억울하게 생각한 아코오 浪士들이 음모를 꾸며 결국 눈내리는 에도의 한겨울 야밤에 吉良의 저택을 침입, 吉良와 죄없는 그의 家臣을 살해하고 자신들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軍國日本도 忠義을 제일 덕목으로 하여 大石을 中心으로 하는 47인을 義士, 吉良를 악인으로 하였으나,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판단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사건 당시 幕府의 初動수사가 미흡했다느니 47명의 浪士들이 노린 것은 吉良가 아니고 공정하지 못한 처사를 내린 幕府에 대한 반항이라는 등 47인의 浪士도 吉良도 모두 피해자라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은 알려면 忠臣藏의 이야기부터 알아야 할 것 같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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