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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투고] 할머니께 올리는 편지

기사입력 2026.02.2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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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선미


    (이 글은 홍콩 한인사회 처음으로 100세 장수하셨던 할머니 고(故) 홍태임 권사님의 천국입성예배에서 손녀 박선미 님이 낭독한 편지입니다.)


    병원에서 언니와 다툰 날이 있다. 할머니가 조금씩 약해지는 모습이 두려워, 마음이 조여들고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졌을 때였다. 의견이 엇갈리며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 할머니는 누워계신 자리에서 눈을 뜨시더니 나를 바라보셨다. 작은 손을 흔들어 언니를 향해 “그러지 마라” 하셨다. 평소 사랑을 퍼주며 에너지 넘치시던 할머니께서, 가장 소란스러운 순간에 가장 고요한 중심이 되어 가족의 화목을 잡아주셨다, 우리 집안의 확고하고 굳건한 기둥처럼 말이다. 


    할머니는 강인하신 분이셨다. 목소리도 크고 재치도 넘치셨다. 와인도 막걸리도 즐겨하셨으며 파마머리를 아주 좋아하셨다. 미용실에 가면 언니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즐거워하시며 식당이든 병원 직원들이든, 집에 일하는 이모님들까지 늘 챙기며 관심을 보이셨다. 기억력은 무척 놀라울 정도였다. 단골 식당 웨이터의 이름, 손자 손녀 가족 모든 이의 생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셨다. 우리 생일이면 가장 크게 노래하셨고, 그렇게 축복의 기도도 잊지 않았다. 규칙적인 삶이 몸에 배어 계셨다. 손톱을 깔끔하게 깎는 일, 샤워와 때밀이, 끼니 시간, 동네방네 전화 통화하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단정한 하루를 위한 의식이었다. 삼촌, 고모, 숙모, 이모, 엄마, 가족에게 전화하는 걸 무척 좋아하셨고, 모든 소식이 궁금하셨다. 드라마를 보시다가 자기만의 줄거리를 덧붙여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함께 창작하는 즐거움을 아셨던 분이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항상 티슈와 성경책이 놓여 있었고 성경책은 아침과 오후 꼭 펼쳐 보시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한 기도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고 기대 없이 주셨고 조건 없이 사랑하셨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총체적인 사랑을 받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할머니에게 받았던 것처럼. 


    할머니가 계실 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잊곤 했다. 젊었을 땐, 할아버지가 바빠 자리를 비우실 때면, 할머니는 꿋꿋이 집안의 터전을 지켜오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평범함 위에 쌓아 올린 삶의 무게는 보통이 아니었다. 100년에 세월 동안, 그 사랑은 가족을 위해 꿋꿋이 버티는 버팀목이 되었고,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할머니는 나에게 일상으로 보여주셨다. 학교가 끝나면 창가에 서서 내가 오는 길을 바라보셨고, 서른이 넘은 나를 문밖에서 배웅해 주시며 “늦지 말라”고 하셨다. 밤이 깊으면 매일같이 걸려 오던 전화는, 내가 들어올 때까지 마루 소파에서 졸다가, 발소리에 안심하시고 방으로 돌아가시던 할머니의 기다림이었다. 마트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찾으셨고, 아침저녁으로 차려 주시던 밥상은 시간이 돼도 변하지 않는 안식이었다. 출근이 급할 때면 현관문 앞에 두유와 사과를 놓아두셨던 그 작은 배려조차, 지금은 커다란 그리움의 그림자로 다가온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우고 나니,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조차 하나하나가 의미로, 그리움의 빛으로 다가온다. 평소 무심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특별한 일상의 기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할머니 덕분에 우리 삶은 풍요로운 순간들로 채워졌고, 함께한 시간은 오직 편안하고 따뜻한 기운이었다.


    병실의 마지막 날들은 예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할머니가 또 우릴 기다렸을 테니.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할머니의 마지막을 미리 점치지 못한 것, 하지 못한 말과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해졌다. 할머니의 회복이 기적처럼 오길, 지치시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할머니가 떠나신 지 벌써 18일이 지났다. 배불리 저녁을 먹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찾아오는 허기처럼, 할머니의 빈자리는 여전히 매일같이 너무 크고, 슬픔은 얇아진 마음을 스치고 간다. 하지만 그 빈자리와 슬픔이, 할머니가 남기신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증명하는 흔적임을 안고 있다.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온전해질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할머니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다시 불꽃처럼 타오르고, 삶이 얼마나 짧고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엄마와도 같은, 삶 그 자체와도 같은 커다란 사랑을 준 할머니, 영원히 그리울 거야. 


    우리 모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까지 할머니가 걸어가신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그리고 이제 편안히 쉬세요.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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