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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뿌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 - 박완기 홍콩법정변호사

기사입력 2025.10.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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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쿼시 코트에서 한참 다른 아이들과 훈련 중인 아들 둘의 모습은 하나의 작은 세계와 같다. 내 아들 둘은 피부색도, 눈동자 색도, 각자의 부모와 사용하는 언어도 제 각각인 다른 아이들과 뒤섞여 땀을 흘린다. 그 모습 속에서 문득 15살의 나를 떠올린다. 조기유학을 떠나 거대한 북미 대륙에 뚝 떨어진 작은 섬처럼 존재했던 주류 사회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나의 색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어린 날의 불안을 말이다. 그런데 내 아들 둘의 얼굴에는 그런 종류의 불안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다름을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 평온하고 단단한 자기 긍정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이 평온함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 것 일까.


    우리는 종종 정체성을 하나의 견고한 땅에 깊이 내린 ‘뿌리’에 비유하곤 한다. 뿌리가 깊을수록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토양에 깊이 속할수록 안정된 자아를 갖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혹은 일본과 중국처럼 강력한 ‘주류 문화(Dominant Culture)’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규범처럼 작동한다. 그곳에서 이방인은 거대한 캔버스에 찍힌 이질적인 점과 같다. 그 점이 아름다운 그림의 일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존 캔버스의 주된 색조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저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생존의 언어가 되고 그 과정에서 ‘소수자’라는 자기 인식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때로는 열등감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이는 내 모습 그대로는 불완전하다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재단해야 하는 숙명적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러나 홍콩은 우리에게 ‘뿌리’와 ‘소속’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아니라 수없이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타일들이 모여 완성된 모자이크에 가깝다. 어떤 타일 하나가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다. 광둥 문화의 바탕 위에 영국의 시스템이 뼈대를 이루고 그 사이사이를 전 세계에서 온 각양각색의 문화들이 촘촘히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주류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비주류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후 다양한 계층의 본토 사람들이 홍콩에 자리 잡게 되면서 홍콩 사람들도 중국 본토 사람들도 주류라고 하기 어려운 특별한 상황이다. 즉 ‘모두가 소수자’이기에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온전한 소수자로 남지 않는 기묘한 연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다르다’라는 것은 극복해야 할 결핍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세계의 기본값이 된다. 학교 교실 옆에 앉은 친구가 프랑스식 영어를 쓰고 앞집 이웃이 라마단을 지키는 풍경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구축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수많은 타일 중 하나로서 자신의 고유한 색과 결을 어떻게 더 선명하게 빛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자신감은 더 이상 주류에 편입됨으로써 얻어지는 외적인 승인 도장이 아닌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라는 내적인 확신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내면에 단단한 축이 세워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어쩌면 ‘뿌리’라는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땅에 수직으로 박히는 것만이 뿌리의 유일한 형태일까. 식물학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땅속줄기 식물인 ‘리좀(Rhizome)’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뻗어 나가며 여러 지점에서 새로운 싹을 틔운다. 중심도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연결되고 확장한다. 홍콩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정체성은 어쩌면 이 리좀을 닮았다. 


    우리 아이들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단일한 토양이 아니라 서울의 할머니 집, 홍콩의 학교, 방학 때 갔던 뉴욕의 박물관, 유튜브로 만나는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모두 연결하는 광대한 네트워크 그 자체일 수 있다. 이들에게 ‘고향’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거쳐온 모든 경험과 관계의 총합이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 ‘나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경계인의 삶이 주는 필연적 고독과 마주할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이전 세대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소속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대신 자신이 서 있는 경계 자체를 새로운 중심이자 가능성의 공간으로 만들어낼 힘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문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가교’의 역할. 그것이 바로 홍콩이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오늘도 스쿼시 훈련은 끝나가고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짜이찌엔, 차오, 빠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 아이들은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 헤매는 세대가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자신만의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시대의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유연하고도 강인한 삶의 방식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절실한 지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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