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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5분만에 읽는 홍콩 현대사 (상)

기사입력 2021.07.2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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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2주에 걸쳐 홍콩 현대사를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홍콩 사회를 시작으로 중요한 흐름들을 짚어본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홍콩 경제


    1950년 10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후, 다음 해에 연합국은 중국에 대한 무역 봉쇄 조치를 취한다. 이로 인해 홍콩의 중개 무역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1952년 홍콩의 총 무역액은 전년 대비 3분의 1로 줄어든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내전의 영향으로 상하이의 기업가들이 방직 기계와 설비들을 홍콩으로 이전시킨다. 당시 홍콩의 인구는 1946년 60만 명에서 내전 이후인 1952년에 이르러서는 213만 명으로 증가한다. 

    자금 및 노동력이 계속 홍콩으로 유입되어 이곳의 경제는 중개 무역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탈바꿈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다.

    1950년대에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 업종은 방직업이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 의류 제조업이 방직업의 규모를 초과하며 홍콩 최대의 산업으로 부상한다. 

    1962년, 전체 수출 규모에서 의류 제조 산업의 비중은 35%에 달하였다. 아울러 1960년 홍콩의 수출에서 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85%까지 증가한다.

    이후 홍콩은 부족한 천연자원과 협소한 내수 시장의 불리한 환경 속에서 정부의 불간섭 정책 및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공업을 발전시킨다. 

    특히 경공업 제품은 소자본을 가지고 간단한 기술로 운영이 가능한바, 홍콩의 경제 상황에 적합하였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은 홍콩 공업 발전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한편 이 시기 홍콩의 인구는 계속 팽창한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중국 대륙에서 대량의 이민자들이 홍콩으로 넘어와 1967년에 이르러 372만 명에 다다른다. 이들은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주거, 교육, 취업, 의료 등에 있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불안전한 사회와 좌파 인사들의 주도로 폭발한 67 폭동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영국 정부는 인근의 공산국가가 홍콩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영국은 홍콩 내의 좌파 인사를 가상의 적으로 가정하여 각종 수단을 통해 이들이 홍콩에서 활동하는 것을 제한한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애국심, 영국 정부의 인종 차별 정책과 부패 등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1950~60년대에 홍콩 내에서의 좌파 세력은 점점 힘을 키워 나간다. 

    이들은 좌익 신문을 창간하고 노동조합 등을 설립하며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홍콩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소극적이었고 시민들과의 소통도 부족하여 사회적 갈등은 점점 확산되어 간다. 

    그리고 1966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홍콩의 사회 내부적 문제와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폭발한 사건이 67폭동이다. 1967년 친중국 성향의 좌파 인사들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홍콩 정부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킨다. 

    초기의 파업 시위가 이후 폭탄 설치, 총격전, 암살 등으로 격렬해진다. 폭동은 6개월이나 지속됐고 이 사건으로 51명이 사망하고 800명이 부상당한다. 결과적으로 과격 인사들의 사회 저항 운동은 너무 폭력적이어서 좌파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은행들의 구조조정, 항생은행을 인수하여 독점적 위치를 확보한 HSBC

    한편 홍콩 경제의 발전은 시중 은행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크게 외자 은행과 중국 자본 은행으로 나뉜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금융 기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은행마다 예금 이자를 높이고 대출 이자를 낮추는 동시에 이들 은행을 고위험 고수익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에 대한 대출로 몰리게 한다. 

    결국 1960년대에 들어 예금 인출 사태를 겪으며 많은 은행들이 도산하거나 외자 은행에 의해 인수된다. 항생은행도 이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65년에 이르러 51%의 지분을 HSBC에 매각한다. 

    HSBC는 항생은행 인수를 통해 독점적 위치에 올라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홍콩 정부는 법규 제정 등을 수립하여 은행업에 대한 관리를 강화한다. 

    한편 67폭동 이후 홍콩 정부는 사회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로 인한 주택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정부는 주택 시장의 최대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1953년 최초의 공공 주택 건축 시행 

     
    정부의 공공 주택 1호는 메이호(Mei Ho) 하우스이다. 1953년 12월 25일에 셰킵메이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50,000만 명 이상의 이재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샴수이포에 위치한 메이호 하우스는 이들을 위해 지어진 최초의 공공 주택 아파트이다. 

    이후 1950년대 말까지 12개의 아파트 단지가 공급되었는데, 이중 홍콩섬 차이완에 완공된 단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룡 지역에 세워졌다.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총 234,059채의 주택이 설립되어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1950년대의 주택지는 매우 남루하였고 독립된 화장실과 욕실이 없는 곳도 허다하였다. 안락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은 주변 이웃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육 시설 또한 부족하여 취학 연령의 아동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들이 주택지 옥상에 지어지는 ‘옥상 학교’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자료: 《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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