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홍콩의 법조계에서 ‘법정변호사(Barrister)’라는 직함은 제법 고고한 귀족처럼 들린다. 가발을 쓰고 법복을 휘날리며 고상한 언어로 정의를 논하는 모습. 하지만 그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겨내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나는 그저 매일 링 위에 오르는 싸움꾼에 불과하다.
법정과 복싱 링.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 두 장소는 닮았다. 두 곳 모두 인간이 자기 육체와 정신의 한계에 부딪히며, 가장 밑바닥의 본성까지 발가벗겨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증명하려는 욕망과, 내가 철저히 틀릴 수도 있다는 서늘한 공포가 언제나 공존한다.
주니어 시절, 나는 해피밸리 경마장의 경주마였다. 게이트가 열리면 시야는 좁아졌고 목표는 오직 하나, 승리뿐이었다. 상대 변호사의 논리를 무참히 짓밟고, 더 치밀하고 파괴적인 서면으로 상대를 침묵시키는 것을 유능함이라 믿었다. 당시 나에게 소송은 속도전이었고 파괴가 곧 능력이었다. 법정에 들어서면 재판부와 적들만 보였고 주변의 공기는 흐릿하게 지워졌다.
그 오만함이 정점을 찍었던 건 몇 년 전 증인 반대신문 때였다. 나는 상대 측 증인을 사냥감 몰듯 몰아세웠다. 질문은 칼날처럼 예리해졌고 태도는 공격적이었다. 그때, 판사님의 건조한 목소리가 내 열기를 툭 하고 끊었다.
“박 변호사님, 적당히 합시다.”
그 무미건조한 한마디에 법정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혼자만 달궈진 쇠처럼 붉게 상기된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전투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거칠어요.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논리가 약해 보입니다. 잠시 휴정하고 다시 합시다.”
어디론간 숨고 싶다는 부끄러움보다 더 큰 것은 무력감이었다. 내가 휘두른 강펀치가 허공을 가르고 제풀에 지쳐 비틀거리는 꼴을 들킨 것만 같았다. 머리로는 힘을 빼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경직된 몸과 마음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2년 전, 소호 린허스트 테라스의 한 건물 10층 복싱 스튜디오를 찾은 건 어쩌면 살기 위한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땀 냄새와 가죽 냄새가 진동하는 그 낯선 공간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복싱 글러브를 끼는 건 나에게 일종의 신성한 의식이다. 나는 랩으로 손을 감는다.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적당한 텐션이 너클을 보호하고 타격의 힘을 온전히 전달하도록. 법정 출석 전의 아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름 하나 없는 흰 셔츠 위에 다크 네이비 타이를 매고 갑옷 같은 핀 스트라이프 쓰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는다. 링에 오르기 전 핸드랩을 감듯 법정에 들어서기 전 나는 수트로 무장한다.
링 위에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코치의 고함도 관중의 소음도 로프 안쪽에서는 웅웅거리는 배경음일 뿐이다. 오직 상대의 움직임과 나의 본능만 남는다. 법정도 마찬가지다. 마이크가 켜지는 순간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상대의 논리가 미세하게 호흡을 놓치는 순간, 증인이 준비된 답변을 끝내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 짧은 틈새. 카운터 펀치는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몸의 반응이다. 힘이 들어가면 반응이 늦고 늦으면 내가 맞는다. 주먹은 살을 파고들지만 상대의 예리한 논리는 내 자존심과 의뢰인의 운명을 벤다.
과거의 나는 상대를 부수기 위한 강펀치 한 방에 집착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결정적인 타이밍과 거리는 결국 어깨에 힘을 뺀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걸. 그것은 법정에서도 링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쓰리피스 정장을 입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래핑을 풀 때 손목에 남아 있던 압박감이 되살아난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타마파크 너머로 빅토리아 하버의 불빛들이 검은 수면 위에서 부서진다.
예전에는 수많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저 수많은 불빛 하나하나가 치열한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누군가의 '코너'처럼 느껴진다. 다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음 라운드를 기다리고 있는 거처럼.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법정에 선다. 상대의 호흡을 읽고 틈새를 노리며 잽을 날리고, 때로는 아프게 맞을 것이다. 두려운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경직되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는 것이다.
나는 넥타이를 조금 더 단단히 조여 맸다. 마우스피스를 무는 심정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일도 싸울 것이다.



게시물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