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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미럴티에 위치한 고등법원, 무거운 법정의 문을 닫고 나오면 나의 또 다른 재판이 시작된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 서류.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치열한 공방. 의뢰인의 운명을 짊어진다는 압박감. 논리의 탑을 쌓느라 탈진해버린 영혼을 이끌고 나는 홍콩 센트럴의 화려한 빌딩 숲 한 켠, 어둡고 매캐한 지하 클럽으로 향한다. 이것은 습관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왜 하필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이냐고? 그곳은 법정과 가장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법정을 완벽하게 배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분쟁 해결 변호사의 삶은 타인의 분쟁, 날 선 악의와 욕망의 찌꺼기를 여과 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다. 의뢰인을 대리해 공격적인 논리를 만들다 보면 언어는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상대를 베어내기 위한 예리한 칼날이 되어버린다.
법정에서의 언어는 무거워야 한다. 빈틈이 없어야 한다. 단 한 줄의 실수가 수백억 달러의 향방을,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을 가르니까. 그 숨 막히는 논리의 감옥에서 나는 때로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논리를 축조한다. 부단히.
어느 날 진행하던 사건의 판결을 받았다. 결과는 우리가 원하던 방향이었다. 나는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승소 소식을 전하고 축하 메시지를 건넸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판결에서 지켜낸 게 정말 정의였을까, 아니면 논리로 짜 맞춰 만든 하나의 서사였을까.
코미디 클럽은 정반대다.
이곳은 코미디언들이 일부러 논리의 틈을 만들고,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공간이다. 인종, 이혼, 죽음. 법정에서는 심각한 쟁점이 되는 소재들이 무대 위에서는 단 30초짜리 펀치라인으로 증발해버린다.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것을 농담으로 만든다. 법정에서 무거웠던 모든 것은 여기서 농담의 재료다. 가장 성스러운 가치가 가장 저속한 농담으로 격하될 때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걸고 지키려던 체면과 자존심이 사실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법정에서 나는 의뢰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인간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싸운다.
“여기 계신 분들 꿈이 다 똑 같잖아. 홍콩에 내 집 하나 갖는 거.
뼈 빠지게 일해서 기적처럼 집을 샀어! 축하드립니다, 은행 자산이 하나 더 늘어났네요.
자 그럼 우리 계산해 볼까. 법적 소유권? 은행한테 있지.
그럼 실질적 점유권은? 집에 계신 가사도우미와 멍멍이에게 있지.
그럼 당신들이 가진 건 뭔지 알아? 30년짜리 모기지 빚더미. 그리고 밤늦게 잠만 자러 들어갈 수 있는 ‘제한적 출입권’. 이렇게 딱 두 개지.
낮에는 가사 도우미가 거실 주인, 저녁에는 개가 소파 주인. 당신은 그 상전들 편히 모시려고 밖에서 성실히 일해서 이자를 갚고 있는 거야.
이쯤 되면 헷갈릴 거야. 누가 누구한테 빨대 꽂고 사는 건지.”
코미디언의 농담 앞에서 관객은 씁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곧 "맞아, 나도 유죄야"라는 집단적 자백이다. 법정에는 단 한 명의 판사가 있지만 여기서는 객석의 모두가 판사다. 웃지 않으면 패소, 웃으면 승소.
하지만 이곳의 패배는 법정의 패배와 다르다. 코미디언이 농담에 실패해 정적이 흐르는 순간조차, 그 실패를 다시 농담의 소재로 삼을 때 우리는 더 크게 웃는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내 세계와 달리 실패마저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들의 연금술. 나는 거기서 숨을 쉰다.
차가운 법리가 인간을 심판한다면, 뜨거운 농담은 인간을 구원한다.
웃음은 검처럼 날카로워 가슴을 찌르지만,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 상처를 치유한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인간의 취약함을 축하하는 예술인 이유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웃을 수 있고, 웃을 수 있기에 비로소 인간적이다.
코미디를 사랑하지만 내게 그 무대에 설 용기는 없다. 관객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웃음으로 치환하는 일은 법정에서의 변론보다 더 큰 용기와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관객석에 앉아 나 자신을 웃으며 용서하는 쪽을 택한다.
오늘도 치열한 공방을 마치고 넥타이를 푼다. 논리와 이성으로 꽉 조여진 뇌의 나사를 잠시 풀어둔다. 풍자와 역설의 무대, 그 조명이 꺼지고 나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은 심각한 얼굴을 한 사람들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지,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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