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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田喜一郞

기사입력 2003.01.1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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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佐吉는 그후 방직기에 동력을 이용하여 동력직기를 다시 만들어 내었다. 그가 27세인 1894년, 장남 喜一郞가 탄생한다. 喜一郞는 발명왕인 아버지 佐吉의 피를 이어받아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한다. 나고야지역의 제일 명문인 明倫中學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 보면 나고야 第 8高 입학에 실패하고 일년을 再修한 후 멀리 동북지방의 仙臺 제 2고등학교를 거쳐 東京大學 공과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喜一郞는 대학 졸업과 함께 아버지 회사인 토요타방직에 입사하여 자신의 엔지니어로서의 실력을 발휘한다. 佐吉, 喜一郞 父子 기술자가 경영하는 \"토요타방직\"에서 만들어 내는 방직기기는 일본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방직공장에 납품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방직공장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어지고 있던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영국의 독점산업이었다. 영국이 세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리는 하였지만 전사자들이 많아 근로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공장시설이 많이 파괴되어 더 이상 세계의 공장노릇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중국시장 공급 독점의 영국산 면포의 공급이 뚝 끊어지자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면서 공장시설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일본이 급격히 영국을 대신하여 중국시장에 파고든다. 토요타사가 만든 방직기계는 불티처럼 팔려 나갔다. 특히 일본기업이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上海지역에 세운 방직공장의 기계납품은 토요타방직에서 맡았고, 당시 上海의 조계지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중 하나가 \"토요타하우스\"라고 불리어진 佐吉邸였다고 한다. 지금도 佐吉邸가 상해에 남아있어 최근 토요타자동차의 중국 진출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 토요타 집안의 \"모노즈쿠리\"정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전후복구로 자동직기 사업은 번창하였지만 그때 미국에서 도입되었던 자동차를 보고 장래는 \"자동직기\"가 아니라 \"자동차\"라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喜一郞였다. 그는 동북대(센다이) 출신의 센다이 시절 동창생들과도 상의, 장래 \"모노즈쿠리\"의 총아가 될 자동차 생산에 열중하였다. 공장 일부에 각종 자동차를 분해, 해체하고 엔진 제조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돈많은 기업들은 돈이 많이 드는 자동차 산업을 외면하고 있었다. 喜一郞가 44세가 되는 해인 1938년, 그는 토요타자동차 회사를 세우고 당시 아이치현 코로모(擧母)에다 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도시가 나중에 토요타자동차의 이름을 따서 토요타시가 되고 지금도 토요타시는 토요타자동차 관련회사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토요타 컴플렉스라는 인상을 준다. 도시의 거대한 스타디움도 토요타사가 지은 토요타스타디움이다. 1999.10.4 토요타시에서 개최된 하나의 축제가 市의 축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날이 토요타의 1억대째의 자동차가 생산되는 날이었다고 한다. 토요타는 喜一郞씨의 사망후 그의 아들 章一郞씨가 이어받아 사장, 회장을 역임하였다. 章一郞씨는 2005년 아이치현에서 개최되는 세계박람회 개최 회장직을 맡고 있어 奧田 전문경영인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있다. 그의 40대 장남 章男씨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의 GM과 토요타 합작회사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국제통이며, 토요타의 앞날은 中國市場에 있다고 하여 지금은 中國진출 본부장(아시아 본부장)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中國에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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