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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중국말 중에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중 하나가 茶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운남성이 원산지인 아열대 상록수 茶가 서양 사람들의 입맛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중국차를 전문으로 수입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차수입에 따른 銀貨의 대량유출을 만회하기 위해 슬그머니 아편을 끌어넣게 되었다. 결국 아편 만연으로 亡國의 위기를 느낀 中國(淸)이 영국과의 一戰(아편전쟁)은 근세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게 되고 홍콩은 그 역사를 새롭게 시작한다.
또한 영국 차는 영국 자신의 역사도 바꾸어 놓았다. 중국차를 가져다가 홍차를 만들어 식민지 미국으로 싣고 가 비싼 세금을 매겨 팔게 되자 미국의 식민지 주민들은 차를 마음대로 마실 수 없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보스턴 티파티(tea party)사건(1773년) 등으로 영국정부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다 2년 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 발발의 방아쇠가 된 것이 바로 tea라고 볼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앞서 16세기 말 일본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도 茶와 관련된 전쟁이란 것이다.
당시 조선의 茶碗이 일본에서는 대인기였다. 특히 일본을 통일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더욱 극성스러웠다. 도요도미의 조선 침략은 그의 옛 主君 오다 노부나가의 茶선생 千利休와 차와 茶碗 사이에 얽힌 갈등이 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設에 근거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조선제 찻잔(茶碗)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혹자는 茶碗전쟁이라고도 부른다.
茶에 대해 가장 이야기가 많은 곳이 홍콩이 아닌가 생각된다. 홍콩이 19세기 중반 중국대륙에서 차와 아편이 서로 만나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위치는 차치하고서라도 홍콩은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이고 중국의 것을 서양에 보급시킨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홍콩에 살다보면 不知不識간에 茶를 알게되고 茶 문화에 접하게 된다. 차 역시 홍콩을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값비싼 茶가 홍콩을 좋아한다. 무게로 따져 황금보다 비싼 茶가 많다. 그래서 석유를 black gold라고 하듯이 茶를 green gold라고 부르기도 한다. 新茶가 나오는 계절이면 홍콩의 돈 많은 사람들이 차 경매장에 몰려 성황을 이루기도 한다.
홍콩주변에는 茶産地가 많다. 운남성(뽀우레이), 복건성(우롱), 광동성(칭웬), 절강성(룽징) 등 중국의 유명한 차산지가 홍콩과 가깝다. 따라서 영국의 茶商들이 中國茶를 集産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콩은 직접 茶産地가 아니면서도 세계적으로 茶의 명소로도 유명하다. 차의 집산지는 과거 복건성의 아모이(시아믄)가 유명했지만 20세기의 중국의 혼란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요즘 일본의 식자들 중에는 茶에 대해 알고 싶어 2박 3일 일정으로 홍콩에 차 체험여행을 온다고 한다. 동서양 각종 차가 팔리고 있는 곳이 홍콩이고 그 차를 마시는 얌차(飮茶)문화가 가장 발달된 곳도 홍콩이기 때문이다. 홍콩에는 그 작은 땅 때문인지 차밭(tea plantation)이 없다. 그래서 홍콩의 차는 스리랑카나 중국의 內地에서 가지고 오는 수입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홍콩에 tea plantation이 꼭 한 곳에 있다. 란타오 섬의 옹핑(Ngong Ping)에 있는 포렌사 근처의 차밭이다. 중국의 silk가 silkroad를 통해 서양에 알려지듯 홍콩의 tea가 tearoad를 통해 서양에 크게 알려졌다. 실크로드가 唐의 長安(지금의 西安)이 출발점이라면 티로드는 홍콩이 출발점이다. 홍콩에 살게 되면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茶를 빼놓고 살 수 없다. 문자그대로 차는 恒茶飯事의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홍콩에서 만나는 사람은 동서양인을 막론하고 모두 茶에 대해 一家見이 있다.
언젠가 란타오 트레일에서 홍콩의 유일한 tea plantation를 찾아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마침 茶를 잘 아는 분들이 同行중에 있어 Lantao Trail의 어려운 등산길에서도 茶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홍차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도 가보고 홍콩에서 중국차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일본사람도 소개받았다.
이번 주 나의 트레일은 이러한 차 이야기를 정리하는 티트레일로 하고 싶다. 홍콩에 계신 분들께 차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국 사람 앞에서 어설픈 중국어를 쓰는 만큼 쑥스러운 일이지만 차에 관한 것을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하고 싶어서 이다.
茶는 차(茶) 또는 티(tea)
서양에서는 티(tea)또는 테(the)라고 하지만 인도·아랍 지역에서는 차(cha)·차이(chai)라고 하고 지금 중국에서도 차(cha)라고 말한다.
같은 중국어(茶)인데도 이렇게 혼용해서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중국의 方言이 지역에 따라 틀려서 같은 글자로 서로 틀리게 발음하여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다. 예를 들면 福建省에는 \"타\"라고 읽고 광동성에는 \"차\"라고 읽기 때문에 차가 어디에서 서양으로 수출되었는가에 따라 \"타\" 또는 \"티\"로 되기도 하고 \"차\" 또는 \"차이\"로 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설명으로는 지금의 茶라는 뜻으로 茶字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고 그 이전에는 茶(tu)(차의 나무木 대신 禾) 라는 글자가 쓰였다고 한다. 즉 글자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7∼8세기 唐朝에 와서야 茶라는 글자로 쓰이고 그 이전에는 맛이 쓴 식물의 뜻으로 茶(tu)가 쓰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차가 자연산으로 발견된 것은 퍽 오래되었지만 실제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4세기경이며 이때는 북방의 기마 소수민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漢족의 국가인 晋은 동남쪽(지금의 남경)으로 옮겨오면서 많은 한족이 남하하게 된다. 또한 일부 한족은 전란을 피해 복건성 산악지대로 숨어살면서 그때부터 최근까지 당시 언어를 그래도 지켜왔다.
中原은 다시 한족인 隋가 천하를 統一하면서 수복되었고 곧이어 唐朝의 황금문화가 꽃 피우게 되고 언어의 변화도 있어서 지금까지 쓰이던 茶(tu)가 茶로 바뀌었다. 그러나 복건성의 차밭의 茶는 여전히 茶(tu)로 불리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복건성의 茶(tu)가 중국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화란인에게 팔려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이름도 복건성 발음대로 tu, tea, the로 된 것이고 그 이후 唐의 長安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간 茶는 새로운 이름 茶가 되었다는 설이다.
廣東(지금의 광주)이 국제 무역항이 된 것이 7세기 唐朝 이후임으로 그 당시 이곳에서 차를 수입한 인도 아랍상인들은 차(cha)라고 불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茶와 글자가 다르지만 옛날에는 차를 茗(ming)이란 글자로도 표시했다고도 한다. 만일 茶대신에 茗이 더욱 유행했다면 지금 우리들은 ××茶 대신에 ××茗으로 부를 뻔했다.
지금도 홍콩의 유명한 茶莊으로 福茗堂이란 것이 있는데 福茗은 福茶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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